한글의 위기, 문법의 위기가 아니라 정밀성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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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14.♡.171.212) 작성일26-09-20 12:36 조회528회 댓글0건이메일 support@hrbank.or.kr 홈페이지 www.hrbank.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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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의 위기, 문법의 위기가 아니라 정밀성의 위기
대한민국의 발전은 한글의 발전과 궤를 같이해 왔다. 높은 문해력은 산업화를 가능하게 했고, 표준화된 언어는 교육의 효율성을 높였으며, 정확한 의사소통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성장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언어는 단순한 소통의 수단이 아니다. 언어는 생각을 구조화하고 전달하는 사고의 운영체제에 가깝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언어 역시 더욱 정교해져야 하는 이유다. 그런 점에서 최근 한국어의 변화 가운데 내가 우려하는 것은 단순한 비문이나 문법의 오류가 아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생각과 표현의 정밀성이 점차 약화되고 있다는 데 있다.
‘~같다’가 지배하는 언어
요즘 방송 인터뷰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식당에서 음식을 먹던 사람에게 "맛있습니까?"라고 묻자, 그는 "맛있습니다"라고 답하지 않고 "맛있는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거나 관광명소에 놀러온 가족에게 느낌을 물으면 역시, "너무 좋아요"라고 답하지 않고 "너무 좋은 것 같아요"라고 한다. 이 표현들 자체로는 문법적으로 틀리지 않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보면 조금 이상하다. '같다'는 본래 직접 확인하기 어려운 대상에 대해 추정하거나 판단을 유보할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비가 올 것 같다", "저 사람이 맞는 것 같다", "내일 주가가 떨어질 것 같다"와 같은 경우가 그렇다. 그런데 음식의 맛은 어떠한가. 지금 내가 직접 먹고 있고, 내 감각으로 경험하고 있으며, 내가 판단의 주체다. 그럼에도 "맛있습니다"라는 직접적인 판단 대신 "맛있는 것 같습니다"라는 간접적인 판단을 선택한다. 물론 이를 잘못된 표현이라고 할 수는 없다. 문제는 이런 표현이 특정한 상황에서의 선택을 넘어, 이제는 일상적인 대화에서 거의 습관처럼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좋은 것 같아요", "아닌 것 같아요", "그런 것 같은데요", "가능할 것 같아요", "맞는 것 같습니다"와 같은 표현은 이제 우리 일상에서 매우 흔하게 들을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사회적 이유가 있다. 한국 사회는 관계와 맥락을 중요하게 여기는 문화적 특성이 강하다. 단정적인 표현은 갈등을 만들 수 있고, 평가에는 책임이 따르며, 지나친 확신은 상대의 반론을 불러올 수 있다. 반면 '~같다'는 훌륭한 완충 장치가 된다. 틀렸을 때 책임을 줄일 수 있고, 상대가 반박하더라도 쉽게 물러날 수 있으며, 의견 충돌을 완화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따라서 이러한 표현 자체가 문제라고 볼 수는 없다. 문제는 그것이 상황에 관계없이 거의 모든 판단의 기본값이 되어 가는 현상이다.
회의실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쉽게 볼 수 있다. "매출이 감소했습니다"보다 "매출이 감소한 것 같습니다"라는 표현이 더 자주 사용되고, "이 전략은 실패했습니다"보다 "실패한 것 같습니다"라는 표현이 더 편하게 느껴진다. "나는 반대합니다"라는 명확한 의견 대신 "조금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신중함과 겸손은 중요한 태도다. 그러나 신중함과 모호함은 같은 것이 아니다. 그 결과 사실과 의견, 데이터와 인상, 판단과 추정이 하나의 문장 안에서 뒤섞이기 시작하면 언어가 수행해야 할 중요한 기능 하나가 약화된다. 그것은 바로 구분하는 기능이다. 사실은 사실로, 의견은 의견으로, 가설은 가설로, 감정은 감정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언어의 정밀성이란 결국 서로 다른 것을 서로 다르게 표현하는 능력이다.
더 흥미로운 변화는 디지털 플랫폼의 확산과 함께 나타나고 있다. 과거 방송 시대에는 아나운서, 기자, 작가, 교사 등 비교적 제한된 언어 생산자들이 대중 언어의 일정한 기준을 형성했다. 그러나, 유튜브와 숏폼 플랫폼의 시대에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제 언어의 권위는 반드시 전문성에서 나오지 않는다. 반복적인 노출에서 형성되기도 한다. 알고리즘은 문장의 논리적 정합성이나 표현의 정밀성을 평가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얼마나 오래 보고, 얼마나 많이 클릭하고, 얼마나 빠르게 공유하는지를 중심으로 콘텐츠를 확산시킨다. 그 결과 정확한 표현보다 익숙하고 자극적이며 쉽게 소비되는 표현이 더 널리 퍼질 수 있다. 수백만 번 반복된 표현은 어느 순간 하나의 언어 습관이 되고, 그렇게 형성된 언어 습관은 다시 우리의 사고와 표현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나는 이것을 단순한 국어 규범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우리가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고 판단하느냐의 문제다. 어떤 사회가 사실보다 인상을, 판단보다 유보를, 명료함보다 모호함을 지나치게 선호하기 시작한다면 그 변화는 언어에서 먼저 드러날 수 있다. 언어는 생각의 결과물이면서 동시에 생각을 만들어내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구체적인 언어로 구분해 표현하려는 경향이 있고, 정확하게 표현하는 사회는 서로 다른 의견과 사실을 구분하면서 토론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정확하게 토론할 수 있는 사회일수록 더 나은 의사결정을 할 가능성이 커진다.
AI 시대에는 오히려 언어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좋은 질문은 좋은 답변을 이끌어내고, 질문이 구체적일수록 AI 역시 더 정확한 결과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추정인지, 어떤 조건을 전제로 하는지 명확하지 않은 질문은 그만큼 부정확한 답변으로 이어질 수 있다. 결국 부정확한 언어는 부정확한 사고를 낳고, 부정확한 사고는 부정확한 의사결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한글의 경쟁력은 단순히 문자의 구조적 우수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사실과 의견을 구분하고, 개념을 명확하게 정의하며, 자신의 생각을 정밀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데에도 있다. 따라서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옛 문법책에 적힌 규칙만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명확하게 생각하고, 명확하게 말하고, 서로 다른 생각을 정확하게 구분하며 토론하는 문화다. 결국, 한글의 위기는 문법의 위기가 아니다. 생각을 얼마나 정확하게 하고, 그것을 얼마나 정밀하게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그리고 그 정밀성은 결국 우리 사회가 어떤 수준의 사고와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지를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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